무인도에서
※엔딩 이후 시점
“뭐, 이렇게 된 것도 이야기의 흐름이라면 어쩔 수 없지.”
아이를 재우듯 나긋한 목소리로 읊조린 제라미 브라시에리는 긴 다리를 뻗으며 백사장에 드러누웠다. 쏴아아─ 노을이 지는 하늘 아래 잔잔한 파도는 물결에 부서진 조개 부스러기를 더욱 잘게 쪼개길 반복한다.
“가끔은 이런 막연한 여유도 좋지 않겠어. 특히나 날이 갈수록 무리하는 기라 네게는 더더욱…….”
“제라미. 이건 보통 막막하다고 하는 거야.”
“어이쿠おおっと.”
답지 않게 단어 선택을 잘못했네. 상대의 미성에 어젯밤도 곤히 잠자리에 들었던 기라 하스티는 막 젖은 망토와 겉옷의 물기를 꼭꼭 짜내어 야자수 나무에 걸어 놓은 참이다.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도 가리지 않고 공평히 보내─재워─버리는 데 일가견이 있는 이야기꾼의 입술이 빙그레 호선을 그린다.
“너무 그러지 말고.”
몸에 걸친 흰 의상보단 짙은 하얀 모래 안에 충갑으로 덮인 보랏빛 손을 넣고 뒤적이자 어디서 공수한 건지 감도 잡히지 않는 선글라스가 불쑥 튀어나왔다.
“미안 제라미. 우리가 순찰 중에 무인도에 조난당한 이 상황에 무슨 행간이 있단 건지 전혀 모르겠어.”
“지금은 즐길 타이밍이란 거야.”
통상적으로 사람의 눈이 위치한 두 곳 아래 조그만 여섯 개의 렌즈가 옹기종기 달린 선글라스를 멋들어지게 쓴 제라미가 대뜸 기라의 옆으로 거미줄을 쏘았다. 빵! 기막힌 디자인에 넋을 놓고 있던 기라는 친절한 발포음에 한박자 늦게 펄떡 뛰어올랐다. 날카로운 검지가 저를 겨냥한 것을 보고도 멍하니 있던 건 저를 향해 무엇도 쏠 리 없단 신뢰 덕이다. 피해는 없었으나 놀란 가슴을 부여잡은 기라는 마치 믿는 인간에게 꼬리 밟힌 포유강 식육목 레서판다과 짐승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서, 설마 날 사냥하려고,”
“너お前さん를 여기서 잡아먹는 건 여러모로 좋은 선택이 아니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감정이 생생히 살아있는 낯에 새어 나온 웃음을 참지 않은 제라미는 고개를 까딱인다. 그것을 따라 시선을 돌려 보니 종종 상대가 애용하던 것과 비슷한 그물침대가 야자수 사이에 엮여 바람에 흔들거렸다. 우와. 숨길 줄 모르는 감탄이 튀어나오자 해먹의 위로 가림막까지 쭉쭉 뽑아내는 것이 할머니의 요술 뜨개질 같다.
“이런 것도 할 수 있구나.”
“매번 해먹을 들고 다니는 건 비효율적이잖아? 누워봐도 좋아.”
“어쩐지 이샤바나의 메이드들이 자꾸 거미줄 치우는 게 힘들다고 하더라.”
“……지금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제라미 대단하다.”
히메노가 잡히기만 하면 대왕 거미의 허리를 끊어버리겠다고 했던 건 절대 말할 수 없다. 그러게 건설을 했으면 철거도 잘했어야지 제라미……!
“흠, 칭찬은 고맙지만 나를 보는 표정이 좀 이상하구나.”
기, 기분 탓이야. 제라미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을 뿐이라고. 대답에 제라미가 큼지막한 물음표를 띄우건 말건, 기라는 가진 적 없던 할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느끼며 해먹에 몸을 기댔다. 짠 내음을 품은 바람이 서쪽에서부터 불어온다. 여름임을 증명하듯 느긋하게 저물어가던 노을이 완전히 어둠으로 뒤바뀌고, 어두운 하늘에 총총 뜬 별과 어스름한 달이 뜬 풍경이 새로웠다. 어쩌면 낯선 장소보다 혼자가 아니란 점이 중요한 걸까. 대비 없이 떨어진 무인도란 것도 잊고 마음이 들뜬다. 성안에서 보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야.”
어느새 모래찜질 즐기기를 그만두고 옆 나무에 새로운 해먹을 짠 제라미가 제법 즐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펼쳐진 그림을 보아하니 해먹에서 그치지 않고 거미줄로 임시 천막을 만들어 보려고 했던 듯한데, 야외 취침에 신이 난 기라를 보고 그만둔 모양이다. 단순히 힘에 부쳤던 것일 수도 있다.
“여름휴가를 즐길 틈도 없이 일이 몰아치던 와중 해풍에 휩쓸려 날아간 배와 강제로 부여된 여름휴가는 어때.”
나쁘지 않지. 아마도 내일 중으로 돌아오지 않는 우리를 찾아 슈갓이 출동하겠지만,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을 사소한 ‘행간’을 즐기기엔 충분하다. 물론 일이 마무리되면 제대로 여름휴가를 떠나는 것도 잊지 말자고.
기라…… 벌써 잠든 거야? 어쩔 수 없네.
좋은 꿈 꾸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