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성(熱性)
※스포일러 포함
여름은 통증의 계절이다.
뜨거운 아스팔트.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
끈적함으로 뒤덮인 피부, 온몸에 도는 열기, 머리카락과 하나 된 땀...
이쯤 늘어놓고 나면, 장점 같은 것은 상쇄되고도 남는다. 얼굴로 시작된 열기가 좀처럼 식지 않을 때. 해 질 녘 공기를 맡고 숨이 턱 막혀버렸을 때. 뙤약볕이 따가워 눈물이 줄줄 흐를 때. 그럴 때마다 질긴 생명력과 저주받은 몸뚱어리를 원망하곤 했다. 타고난 체질이 이 모양이라, 운도 없지. 남몰래 중얼거린 적도 있다.
“시원한 냉차 가져왔어. 쭉 들이마셔!”
저주는 저주고, 이를 대비하는 건 다른 문제다. 올해도 어김없이 폭염주의보 발효. 연일 35도를 웃도는 근심한 폭염에 더불어 열사병 경계경보까지. 류우지에게 있어 재난이나 마찬가지였다. 소식을 전해 들은 특명부 사람들 또한,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이거 완전…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 취급이네.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인류를 구하는 힘. 그만한 가치에 대가가 따르는 건 당연하니까. 애먼 사람에게 화풀이할 생각도 없고, 고달픈 쪽에 가깝다. 한편으론 여전히 의문이 솟구친다. 열이 많은 체질이라서, 그대로 ‘열폭주’가. 아무리 그래도 둘에 비해 페널티가 막심하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린다. 이래선 안 돼. 히로무랑 요코는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고, 진 선배도 최선을 다하고 계시잖아. 다 같이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마음이 흔들려서 어쩌잔 거야. 선배 다음 연장자로서 모범을 보이라고. 정말, 한심하네… 따위의 자기 비난과 반성을 거친 후.
그는 모두가 알던 이와사키 류우지로 돌아온다.
“왼쪽!”
경고를 듣자마자 몸을 틀었다. 익숙한 전투였다.
단 한 번의 방심만 없었다면.
“류우지 씨!”
어떠한 빛이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프지 않았다. 피도 나지 않았다.
‘맞은 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엔터가 웃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블루 버스터.”
Ça va. 특유의 인사말만 남긴 채 사라졌다.
에네트론을 지키는 데 성공했으나 고버스터즈는 찝찝함을 안고서 복귀했다. 이유인즉슨 류우지가 어느 빛에 노출됐을뿐더러, 엔터의 태도와 관련해서 영 석연치 않은 곳이 있기 때문이다. 방금 일어난 일을 쿠로키 사령관에게 보고하자, 쿠로키 역시 의구심을 품었다. 그는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고 각자에게 휴식을 알렸다.
“류우지 씨, 괜찮으세요?”
“한방 먹은 것 치고 아무렇지도 않아.”
한편, 류우지의 상태는…… 지나치게 멀쩡했다. 고라사키가 난리 칠 때만 해도-고라사키의 유난이라면 이미 익숙하지만 이번엔 산증인이 다섯이었다- 다들 큰 이상이 생긴 건 아닐까,라는 반응이었는데 앞서 반응이 무색할 만큼 류유지는 평소와 같았다.
이상 없음을 판정받은 류우지는 훈련실로 향했다. 엔터야 사사건건 부딪히며 방해하는 게 일이라지만, 넋 놓다가 맞은 저의 탓도 있으니.
“정말 괜찮아요?”
“깜짝이야. 어디서 나타난 거야?”
난데없이 나타난 히로무가 눈을 치켜뜨고 물었다. 누가 보면 취조당하는 줄 알겠네.
“검사 결과 다 같이 봤잖아.”
“그렇긴 한데, 저희 몰래 속이는 게 있다던가…”
“아… 하하. 날 뭐로 보고. 그런 거 아니야.”
“…”
“…”
“…엔터 말이에요.”
“응?”
“이상하지 않았어요?”
“확실히.”
“엔터 성격상 쉽게 물러날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오늘은…”
“왜 그래?”
“류우지 씨가 어떻게 판단하실지 몰라서요.”
“난 또 뭐라고. 솔직하게 말해줘.”
“그 빛은 류우지 씨를 노리고 쏜 것 같았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미련 없이 떠난 것도 마음에 걸리고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때 상황을 되짚는다. 당시 엔터는 기세등등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여유를 잃지 않았다. 마치 숙원을 해결한 사람이 보일 법한 태도. …엔터에게 그만한 난제가 있었나?
이런저런 가능성을 염두에 둘 무렵,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히로무였다. 대화 도중 그는 종종 부담스럽게 바라보곤 했는데, 괜히 민망하더란다.
“저, 류우지 씨.”
대답하기 전에 곧바로 이어진다.
“문제 생기면 말해주세요.”
“응?”
“저라도 나서서… 도울게요.”
왜인지 압박감이 더해져서.
“꼭이요.”
“응”이라고 답해버렸다.
.
.
.
.
.
.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법일까.
처음엔 아무 일 없었다. 통증은커녕 사소한 징후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 되던 날. 꼬여도 제대로 꼬여버렸다. 뒤늦게 이상함을 깨닫지만, 이미 벌어진 후였다. 결국 커다란 문제를 맞닥뜨리고 말았다.
“하아.”
류우지는 과거 자신이 몸 상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과 결과만 믿고 아무 시도하지 않은 안일함에 대해 원망했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소용없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았다.
류우지 씨.
문득 떠오른다.
문제 생기면 말해주세요.
누군가 굳은 의지로 말하는 모습이.
저라도 나서서,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도울게요.
내가 너를-
꼭이요.
…관두자.
Q. 사쿠라다 히로무가 이와사키 류우지에게 어떤 존재인가?
A.
1) 리더
2) 믿음직한 동료
3) 13년 전 아공간에서 탈출하고, 공동의 적과 함께 싸우는 자신보다 여덟 살 어린 남동생
4) 음……
여기까지 와서 여전히 인정할 마음이 안 든다면… 그 이유는 고질병 때문일까.
“나도 참… 뭐 하고 있는 건지.”
십 초에 한 번씩 꺼지는 한숨은 얼마나 막막한지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해준다. 그도 그럴 게, 이 나이 먹고 첫사랑이라니. 짝사랑이 올바른 명칭인가? 어느 쪽이든 악조건이란 전제는 변치 않는다. 최소한 또래를 흠모한다면 모를 일이었다.
짝사랑 상대는 스무 살, 팀내 동료. 게다가 동성이다. 누구나 어릴 적에 가정을 꾸리는 상상을 해 본다지만, 이런 식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계기라고 해봤자 우습다. 매일 보던 얼굴, 목소리가 그날따라 선명하고 또렷하게 다가왔을 뿐이다. 종소리가 들린다든가, 가슴이 찌르르 한다든가, 그런 쪽으로는 일절 없으니 망정이었다.
어젯밤에 대해 말하자면, 류우지는 밤새 머리 싸매고 고민한 끝에 겨우 정의 내린 감정을 깨닫기 무섭게 포기했다. 히로무가 아끼는 동료이자 동생 같다는 걸 떠나서 그의 발전이라곤 없는 눈치도 한몫한다. 그의 머릿속에 과연, 버그러스 말고 무엇이 있을까. 장담하건대 이와사키 류우지는 없을 것이다. 비좁은 칸을 차지할 수도 있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류우지가 수상한 빛에 노출되고 엔터 역시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 시기에 종적을 감췄다는 건, 의미를 내포하지 않을까. 제멋대로인 적이더라도 생각 없이 군 적은 없었기에-의심의 뿌리는 정체 모를 빛이 히로무를 달리 보게끔 했다는, 일종의 실낱같은 희망에서부터 시작되었을 터-모든 일의 원흉은 엔터가 아닐까, 하고.
합당한 추측인데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이 찔려왔다. 어찌 됐든 결론은 하나다. 예전처럼 히로무를 대하지 못한다는 결론. 만에 하나 히로무가 알게 된다면… 우선 경멸하지 않을까. 그 녀석 성격에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명제부터 틀렸을지 몰라.
애초에 나는 뭘 하고 싶은 거지? 연인이길 바라는 건가? 히로무와 내가… 연인?
“류우지 씨, 여기 계셨네요.”
“어?”
“왜 그렇게 놀라세요?”
“아니… 아무것도.”
남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의 그림자가 비친다더니.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별로?”
“대답이 늦는데요.”
“최근 들어 엔터가 활동을 안 하니까. 나름대로 조사 중이야.”
“그래요? …류우지 씨.”
이름만 몇 번 부르는 거야. 사람 놀라게.
“할 말 있어?”
“무리하시는 것 같아서요.”
“너야말로 평소에 무리하잖아?”
“류우지 씨는 필요 이상으로 생각이 많으니까요.”
“거슬리니까 하지 말아달란 얘기야?”
모르고 욱했다.
“신경 쓰여요.”
“…에?”
“임무에 지장 갈 게 분명하니까요.”
“아, 그런 쪽?”
기대한 내가 바보지.
“진 선배가 이미 말씀하셨지만, 혼자 앓진 마세요.”
“고마워.”
눈물 나게 고마워.
* * *
열폭주.
백신 프로그램이 낳은 부작용.
아이러니한 일이다. 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이, 저를 죽이기도 하니 말이다. 양날의 검과 같은 간극, 또는 모순.
그간 열폭주를 다스리고자 부단히도 애썼다. 냉감 시트는 물론 해열제, 스포츠음료, 휴대용 선풍기… 덕분에 주머니가 남아나지 않는다. 왜 이리 유난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뭐라 설명할까.
별수 없다. 여름은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계절이라, 만반의 준비를 가해야 했다. 앞서 나열한 것들은 무더운 여름을 버티게 해줄 생존 장비였다.
올해는 훨씬 위험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유인즉슨 기존의 열폭주와 다른 ‘열폭주’를 컨트롤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안색이 안 좋은데. 혹시…”
사랑.
“더위 먹으셨어요?”
어쩌다 터득해 버린 감정은 낯섦의 연속이었다.
‘차라리 더위 먹은 게 낫지.’
그러니 더 큰 위기다.
<진정한 사랑으로 거듭나기 위한 백만 가지 걸음>
첫째, 자꾸만 생각나는 사람이 생겼는가.
둘째, 그 사람의 사소한 말과 행동이 이상하리만치 오래 기억에 남는가.
셋째, 괜히 한 번 더 마주치고 싶어지는가.
넷째, 눈이 마주쳤을 때 심장이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뛰는가.
다섯째, 그 사람이 웃으면 나도 따라 웃게 되는가.
여섯째,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게 되었는가.
일곱째, 별것 아닌 연락에도 하루의 기분이 좌우되는가.
여덟째,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일이 유독 그 사람에게는 중요해지는가.
아홉째, 그 사람의 행복을 바라게 되었는가.
열째, 그 행복에 내가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중략
스물여덟.
팔자에 없는 사랑을 하게 된 류우지는 매일이 곤욕스러웠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간사해서, 한 번 높은 곳을 올려다 보면 다음번에도 올려다 보려고 한다. 즉, 한 번 이상을 맞본 자는 계속해서 이상을 펼치려고 한다는 것이다.
눈이 시릴 만큼 파란 하늘.
따갑게 내리쬐는 햇빛.
매미 울음소리.
여름의 정취를 한데 담아낸 듯한 풍경 속에서 류우지는 사색에 잠겼다. 언젠가 존경하는 선배에게서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라고 충언을 들었던 기억이 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얼마 전, 비로소 자신의 이러한 상황이 엔터가 만든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내막은 이렇다. 감감무소식인 엔터가 갑자기 나타나 에네트론을 갈취했다. 단단히 벼르고 있던 류우지는 곧장 쫓아갔고, 일대일로 대치하다가 뜬금없는 말을 들었다. 내가 준 선물은 잘 받았나요?
“역시 네가 원흉이었어. 그 빛은 뭐였던 거지?””
“유의미한 결과를 거두었으니 알려주도록 하죠. 답은 ‘동기’입니다.”
“동기라고?”
“Oui! 분노, 열등감, 나약함… 부정적인 감정을 모아다 하나로 치환했습니다. 블루 버스터의 체내는 흥미롭더군요.”
“그게 무슨 뜻이야? 똑바로 말해!”
“배양은 아주 성공적입니다. 덕분이에요.”
“잠깐, 엔터…!”
“싹은 제가 틔웠지만, 물을 주면서 무럭무럭 자라게 한 역할은 당신이 컸습니다. 명심하시길.”
사랑이란 감정의 이해를 도모하고자 당신을 실험에 이용했다고 하는 편이 옳지만… 말해 줄 필요 없지.
정답을 들으면 후련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복잡해졌다. 엔터 말대로라면… 히로무를 좋아하는 마음은 순전히 내 몫인가.
구십구만 구천구백아흔아홉째, 마침내 이것이 사랑임을 인정할 수 있는가.
“류우지 씨?”
“…히로무.”
왜 여름만 되면 사랑에 빠지는 걸까. 소란스러운 틈을 타 마음이 들뜨기라도 하는 걸까.
“히로무, 나 할 말 있는데.”
백만째, 그런데도 사랑할 것인가.
여름은 통증의 계절이다. 뜨거운 햇빛이 피부를 가르고, 눅눅한 공기는 숨을 막고, 열대야는 단잠을 빼앗는다.
이처럼 하나의 고통이 또 다른 고통을 불러오는 연쇄 작용 속에서, 사람들은 어쩌면…… 사랑까지 앓게 되는지도 모른다.